8시 반. 짐을 다 정리하고 숙소를 나서니 9시 반이었다. 날이 흐렸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우산은 내 것 하나 뿐이었다. (지난번 여행에선 내가 빠뜨리고 E양이 챙겨갔었는데...훗)
소고백화점 앞 시계. 백화점이 문을 여는 10시 직전에만 이렇게 시계판이 움직이고 인형쇼(?)가 벌어지는 모양이다.
전차를 타고 다시 소고백화점 옆 버스 센터로 가서 짐을 넣고, 혼도리에 있는 안델센 제과점으로 갔다. 어디선가 여기 아침세트가 맛있다는 글을 보고 기억에 담았는데, 워낙 커서 못찾을래야 못찾을 수가 없었다. 1, 2층을 통째로 써서 빵집과 까페, 레스토랑에 꽃집과 초콜렛/와인 판매점까지 모두 갖춰놓은 대형 제과점. 분위기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데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아침을 먹으니 지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몰랐지만 안델센의 모닝세트는 10시 반까지였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10시 25분이었다 ^^ 참고로 점심세트도, 오후 티세트도 있다.
안델센의 아침 세트. 머핀, 에그, 베이컨. 여기에 까페라떼를 더해서 490엔이다.
E양이 먹은 것까지, 전체 다...
비가 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천천히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히로시마 여자들은 세련된 편이다. 나중에 교토나 오사카에 가서도 새삼 느꼈지만... 이유가 있으려나?
전차를 타고, 졸다가 밖을 보다가 하면서 미야지마구찌 역에 도착한 것은 벌써 점심 시간이 넘어서였다. 히로시마 중심부에서 3, 40분쯤 걸리는데,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없어져서 새로 지은' 지역이 아닌 듯한 낡은 집들도 볼 수 있다. 아무튼, 그래서 역에 도착, 페리를 타고 10분을 가서 미야지마에 도착했다.
유명한 미야지마의 '바다에 잠긴' 오도리이
섬에 가까워지면서부터 그 유명한 물에 잠긴 도리이가 보인다. 녹나무를 자연 그대로 사용했다나 뭐라나... 물에 잠긴 모습만 봐도 좀 묘하긴 하지만 이쓰쿠시마 신사 안에서 보니 그 너머로 뿌연 바다가 펼쳐져서, 말 그대로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처럼 보였다. 섬을 떠날 때는 물안개가 많이 퍼져서 더 그랬고. 하지만 썰물 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그냥 촌스러운 붉은 칠 기둥으로만 보인다(쿨럭)
오도리를 보고, 내려서 가게마다 널린 모미지(단풍)빵을 보자 작년 추석때 경주에서 사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주인아저씨가 미야지마에서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다고 했던가... 그때는 미야지마 같은 곳에 갈 일은 없을 줄 알았건만, 몇 달 지나지도 않아서 와 있다니.
일본 3경 미야지마. 물론 원래 어디의 몇 대 절경이니, 최고의 명승지니 하는 곳은 반반 확률로 '별로'이기 십상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미야지마에 대해서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세계문화유산이라고 다 그만한 이름값을 하는 게 아닌 것도 알기에, 이쓰쿠시마 신사에 대해서도 큰 기대가 없었다. 그래서 결론은? 기대 밖으로 굉장히 좋았다면 참 좋았겠지만... 산책하기 좋은 작은 섬이었다는 정도다 ^^; 날씨가 좋았거나 단풍이 만발했다면 훨씬 멋있었겠지. (하지만 단풍 들어서 안멋있는 산이 어디 있을꼬)
흠. 그나저나 이 섬이 '신성하기에 산부인과도 묘지도 없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풀어 키우는 사슴
배에서 내리자마자 사슴들이 다가와서 깜짝 놀랐는데, 여기 사슴은 나라의 버릇없는 사슴들과 달리 얌전하고 귀여웠다 ㅠ_ㅠ 부슬비가 내려서 그런지, 좀 추워서 그런지 몇 마리씩 옹기종기 모여서 몸을 붙이고 자거나 처마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 물론 어차피 사람들이 자기를 해치지 않는다는 거야 눈치가 빤할 테고... 먹을 것을 내밀면 또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몇 시간의 산책. 케이블카를 타고 산 위까지 올라가면 볼 게 더 많지만, 날씨도 안좋고 해서 아래쪽만 슬슬 걷고 말았다. 기념품 가게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아서 조금 유감이었다.
센죠가쿠 처마밑에서 찍은 고쥬노토(오중탑)
호오조오 앞길. 사진만 보면 완전히 봄이다 -_-
골목길... 멀리 보이는 연녹색 지붕이 다이쇼오인이다
오르막 내리막. 집채만한 나무 주걱(이것도 미야지마 명물이다. 밥알이 안붙는다나 뭐라나 하면서 작은 주걱도 판다), 멀리서 보면 멋있지만 가까이서 보면 늘 고개를 젓게 되는 주황색 오중탑과 음산할 정도로 낡은 센죠오가쿠, 운치있는 자리에 아담하게 지어놓은 호오조오, 긴 계단 중앙 난간에 시주함을 설치하고 양옆으로 촌스러운 굴축제 광고깃발을 쫙 꽂아놓아 올라갈 마음이 뚝 떨어졌던 다이쇼오인, 그 앞에 있던 누군가의 고택, 처마밑에서 눈을 굴리고 있던 목수(木獸), 지도에 나와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작은 키키모라 신사...
이렇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배가 고파져서 식당에 들어갔다. 굴을 싫어하는 E양은 덮밥을 시키고 난 굴우동을 시켰는데...유명한 관광지라 시내보다 비싸긴 해도 맛은 있더라. 음. 사실 나도 굴을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히로시마 굴이 유명하다니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 700엔짜리 우동을 시키면 크고 싱싱한 굴을 한 다섯개쯤 얹어주는데, 생각보다 훨씬 맛있어서 놀랐다 0_0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히로시마 굴이 맛있더라고 말하자마자 언니는 대뜸 "원폭 떨어진 동네 굴을?" 이라고... 젠장 너무해 ;_;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쓰쿠시마 신사(嚴島神社). 593년에 세웠고 12세기에 개축했으며 현재의 본사, 본전은 16세기에 지었다고 한다. 400년이 넘은 목조 건물이라. 그것만해도 무시못할 문화재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밀물 때 아래쪽이 물에 잠긴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렇게 특이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후우. 우리가 갔을 때는 썰물이 절정이었던 데다가 작년 9월의 태풍 피해로 여기저기 보수공사중이어서 별 감동이 없었다. 멀리서나 위쪽에서 찍은 사진... 혹은 이런저런 만화에서 써먹은 이미지들이 훨씬 더 신비스럽다. 당연하겠지만.
이쓰쿠시마 신사 회랑
신사를 한 바퀴 돌아보고 배타러 가는 길에 모미지 빵을 먹었다. 원래는 예전 경주에서 먹어본 걸로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지나다니다보니 "치즈맛"이라는 안먹어본 놈이 있길래... 그러나 오후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치즈맛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_; 할 수 없이 녹차맛과 건포도맛을 하나씩(하나에 75엔씩) 먹어봤는데 건포도맛이 아주 훌륭했다... 그러나 며칠 전 한국에서 들으니 치즈맛이 최고란다. 왠지 분하다(먼산)
비는 계속 부슬부슬. 미야지마를 떠나는 배 안에서 보니 아래쪽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물안개가 산을 거의 덮었다. 케이블카를 타려고 했어도 운행을 안했을 것 같다. 이제까지의 여행력을 돌이켜보면...나도 케이블카와는 어지간히 악연인가보다;;
히로시마로 돌아가는 길 중간에 스누피샵에 들렀다. E양이 스누피 광이라 떠나기 전에 히로시마와 오사카에 있는 스누피샵 위치를 다 프린트해갔던 것... 이 이야기는 합쳐서 나중에 하자. 아무튼 나 혼자였다면 갈 일이 없었을 만한 곳인데, 생각보다 즐거웠다. 일본은 정말 스누피샵에 별별 물건이 다 있더라 ^^
그리고 시내로 가니 벌써 저녁때. 우선 북오프에 다시 들렀는데, 여기서 1시간 동안 타마키 신의 2821 코카콜라와 푸른하늘 등을 찾아냈다. 럭키~
북오프를 돌고 나니 피곤이 몰려온다. 그러나 버스 시간은 11시. 일단 혼도리 니시(서)쪽으로 가서 찾아낸 24시간 밥집에서 카레라이스로 싸게 끼니를 때우고... 남은 시간에 히로시마항에 가보기로 했다. 사실 히로시마 항이라봐야 세토 내해로 나가는 배들이 떠나는 선착장이 있을 뿐... 애초에 관광지가 아니기에 별로 볼 것이 있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차나 더 타고 길거리 구경이나 할 겸 가본 것. 이것도 꽤 즐거웠다. 히로시마 항도 30분쯤 걸리다보니 차창 밖으로 나름대로 오래되고 낡아보이는 주택가가 보인다.
히로시마항까지 가서 무엇을 했는가 하면, 불빛도 거의 없이 꺼먼 바다만 내다보이는 큰 창 앞에서 바나나를 먹었다(...)
사실은 숙소를 떠날 때 아주머니가 주신 건데, 온종일 먹을 짬을 찾지 못하고 들고다녔던 것. 색이 거무죽죽해졌더라. 아하하. 배가 고파진 건 아니지만 도저히 더는 못들고 다니겠어서 억지로 먹었다는 슬픈 사연이 있다. 음.
중심가로 돌아가니 10시가 넘었다. 급한대로 버스센터에서 간단하게 씻고 짐을 찾아서 대합실로 갔다. 후쿠오카->히로시마행보다는 훨씬 좋은 버스라 그런지 대합실도 좋더만. 그러나 넓게 세 줄로 좌석을 배치해놓은 좋은 버스였는데도 잠은 더 못잤다. 우째서?! 열악한 환경이 더 잘맞는 건가 설마!(...)
어쨌거나 자고 일어나니 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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