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아바시리는 아이누어로 '들어오는 곳'이라는데, 오호츠크해를 면한 북부 항구도시로 겨울 유빙 관광이 유명하다.
그러나 내가 여행한 계절은 가을.
슬슬 추워지고 있기는 해도 바다에 떠도는 얼음이 있을 정도로 극지방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여기까지 가려고 마음먹은 이유도 시레토코 반도와 오호츠크해였기에 유빙에 큰 미련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기는 무엇하니, 아바시리 유빙박물관이라도 보기로 하고 버스를 타고 나갔다.
아바시리라는 도시가 묘하게 생겨먹은 게, 보통 북해도의 어지간한 도시는 다 걸어서 다닐 만 하던데 여기는 박물관이 다 산속에 있고 시내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어서 걸어다니기가 좋지 않다.
어쨌든 버스를 타고 산속에 있는 유빙박물관부터 안착.
일단 단풍이 가산점
내부에는 실제 유빙을 보관하고 있다. 실내온도도 영하 17도 정도.
유빙의 천사라고 불리는 클리오네도 어항에 보관. 먹이를 먹을 때는 악마로 변한다던데 먹이주는 장면 같은 건 안보여준다...
유빙박물관 전망대마다 나가서 내다본 경치가 더 기억에 남았다. 이쪽은 아바시리 호수였던 거 같고... 반대쪽에는 항구가 있고, 만 건너 시레토코 반도까지 보인다.
유빙박물관을 중심으로 이 산속에는 아바시리의 대표 관광지 세 곳이 모여 있다.
실제로 가장 유명하고 큰 곳은 120년 전통(...)을 자랑하며 북해도 개척에 노동력을 제공한 아바시리 감옥 박물관이지만, 내 우선 목표는 북방민족박물관이었다.
걸어서 이동
보인다, 북방민족박물관!
진짜 북방민족박물관으로, 북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을 필두로 시베리아, 아이슬란드, 알래스카를 중심으로 한 북아메리카 부족들까지 다루고 있다.
매~우 한적하지만 전시품도 설명도 잘 갖춰놓은 좋은 박물관이다. 내부 사진을 잔뜩 찍었지만 굳이 올리지 않고 이것으로 분위기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북방민족박물관을 느긋하게 돌아보고 나와서 버스 시간을 확인했더니... 한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버스가 있다.
안내직원에게 물었더니 택시를 불러서 타는 게 어떠냐고 하고; 날씨도 좋은데 한두시간 걷는다고 큰일날 게 없는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목표는 시내. 감옥박물관과 기타하마역 중에서 후자가 더 땡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씨를 만끽하며 걷다가 샛길이 있길래 음 여기에서 이렇게 가면 이 커브를 가로지르는 거겠지? 하고 갔다가 아니나다를까... 시내와는 정반대로...
감옥박물관에 도착해버렸다... -_)
위에도 짧게 적었지만 아바시리 감옥은 원래 오호츠크해안에서 북해도 중앙부까지 연결하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메이지 시대에 만든 감옥으로,
추위와 가혹한 노동과 식량부족으로 많은 죄수가 목숨을 잃었다는 곳이다. 당시 사망하여 도로 가에 아무렇게나 묻힌 죄수들을 기리는 뜻에서 박물관으로 전환했다는데,
사실 이런 설명을 읽을 때마다 '기리는 뜻에서'와 '박물관'의 연결에 기분이 묘해진다.
그다지 '당시 감옥 내부 재현'에 시간을 들이고픈 기분이 아니었던지라, 감옥을 오가며 지나던 경계선이 된 연못과 다리 정도까지만 보고 철수.
저 문을 지나면 감옥 내부다.
날씨는 또 기가 막히게 좋고...
*
버스시간표는 제대로 맞추지 못했지만 기차시간표는 알고 있었던 터라, 다시 버스를 타고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아바시리역에 도착. 바로 시레토코샤리 행 완행열차를 탔다.
나는 어차피 패스가 있었던 터라 그냥 이용했지만, 아바시리-기타하마역 구간은 그냥 타도 별로 비싸지 않다. 500-600엔 정도일 거다.
20분 정도만 오호츠크해를 따라 달리면 도착하는 간이역. 무인역사로 버려질 뻔 했다가 지금은 카페가 들어섰다고 한다... 는 내용을 책자에서 보고 가고 싶어졌던 건데,
지금 정보를 확인하느라 검색해보니 여기가 무한도전에서 갔던 곳이네? 내 기억력도 참 문제 있다;
카페 옆에 전망대가 있길래 냉큼 올라가서 떠나는 열차를 찍었다. 딱 한칸짜리, 덜컹거리는 열차라 더 정감이 있다.
보다시피 역이 바다와 정말 가깝다.
카페 안에 들어가도 창밖으로 내내 바다가 보인다.
카페는 생각보다 굉장히 아늑하고 따뜻하게 꾸며놓았고, 한쪽 구석에 만화책도 있어서 혼자 시간 보내기 좋게 생겼다.
어딜 가든 책장만 보면 무슨 책이 있나 보는 습관이 있다보니 쭉 훑어보는데 다 아는 만화였지만 '어제 뭐 먹었어?'가 제일 눈에 띄더라 :)
커피와 케이크 세트를 시켜놓고 잠시 놀았다. 여기, 커피도 케이크도 맛있다.
렌트카를 몰고 가다가 들렀던가, 중국인 관광객들 한 팀이 나가고 나자 카페 안이 조용해진다.
이윽고 단골인가 싶은 동네 아저씨가 신문을 들고 들어와서 카운터 앞에 앉는다. 간단한 식사를 시키고, 카페 직원들과 잡담을 나눈다.
일본어를 더 많이 알아들었다면 재미있었을 텐데, 그대로도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상상해보는 맛이 있었다.
역사 풍경
사진은 적막해 보이지만, 파도소리가 꽤 시끄럽다. 바람도 무척 차다. 그래도 쓸쓸한 느낌이 별로 없었던 건 카페 덕일지, 날씨 덕일지.
아바시리와 시레토코 반도를 통틀어서 나에게는 여기가 제일 좋았다.
*
어두워질 때쯤 시간 맞춰 아바시리로 돌아가서 맡겨두었던 짐을 찾고, 아바시리에서 떠나는 노선에서만 먹을 수 있다는 게살밥 에키벤을 사들고 아사히카와행 열차에 올랐다.
이런 놈인데...
커피와 초코케이크가 무리였는지, 몇 술 뜨다가 포기하고 다시 싸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으로 먹어야 했다;
아사히카와 도착 시간은 밤. 상업도시인 아사히카와는 기차역도 그 앞 시가지도 새것같은 느낌이 강하다.
특히나 100년쯤 된 시설물을 그대로 둔 듯 했던 하코다테와 비교하면 더 그렇고...
평소보다 늦게까지 움직인 셈이라, 예약해두었던 비즈니스호텔로 가서 짐을 풀고 바로 잤다. 이제 집에 돌아갈 날이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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