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301번 버스를 타고 풍경을 구경했다. 301번은 야크 호텔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포탈라 궁 뒤쪽으로 돌아서 북서쪽으로 빠진다. 라싸 시내가 멀어지고 조금 있다보니 사원을 가리키는 듯한 표지판이 보이고 사람들이 많이 내렸다. 난 멍하니 계속 보기만 했다. 그리고 나 홀로 종점에 가서야 깨달았다. 그 때 거기가 데뿡사원이었다는 것을-_- 라싸 개발과 함께 종점도 연장된 것이다. 나는 중국어를 못한다. 걍 운전사와 보조운전사에게 '데뿡?'이라고만 했다. 난처한 얼굴로 뭐라고 뭐라고 한다. 하나도 못알아듣지 당연히. 결국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렸는지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종점에 들어가서 돈을 맡기고 나오더니 차를 돌린다. 데뿡 앞으로 열심히 달려가더니 날 내려주고 되돌아간다.
어머나. 이렇게 친절할 수가! 감동하며 바이바이 인사하고 내렸다.
데뿡 사원은 티베트 최대 사원으로 이름이 높다. 창건 역사는 600여년. 지금은 쇠락했다지만 그래도 규모가 엄청난 절이다. 그리고 버스 내린 곳에서 언덕길을 한참 올라간 곳에 있다. 그 아래쪽에는 네충 사원이 있는데, 사실 내가 더 보고 싶었던 건 뵌교의 색채가 진하게 남아 있는 신탁 사원인 네충 쪽이었다.
어쨌거나 용감하게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네충 사원
아무리 적응이 됐다 해도 3600고도에서 걸어 '올라간다'는 건 장난이 아니다. ...라곤 해도 물론 난 고도 0미터에서도 그렇지만;; 언덕 위에 바로 보이는 데뿡과 달리 네충은 약간 옆길로 벗어나 있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열심히 찾아갈 때쯤엔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물도 떨어졌다. 무조건 일단 쉬고 네충 사원을 보고 더 올라가든가 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입장. 입장료는 10위안이다.
정문
데뿡, 세라, 간덴 같은 사원이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데 반해서 조캉이나 이곳 네충 같은 사원은 건물이 몇 채 없다. 어쨌든 진한 붉은색 건물이 인상적이다.
내부. 향이 오르고 있고 회랑 앞에 빈틈없이 휘장을 쳤다.
날씨가 변덕스러운 탓도 있겠지만, 관광객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관광객인가 싶은 사람이 서넛 정도. 나머지는 다 참배객이다. 나중에 보니 꽤 비싸 보이는 자동차를 타고 온 장족 가족도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과연, 장족 중에도 소수긴 하지만 차를 몇 대씩 굴리는 부자들이 있다 한다)
이 사원은 과연 흥미로웠다. 솔직히 말해서 다른 불교 사원보다 몇 배는 흥미진진하다. 우선 벽화가 정말 훌륭하고, 사원 내부의 장식이나 불상(?)도 다른 사원과 다르다. 예를 들면 아래 문을 보라. 가장자리는 모두 해골을 그려넣었고 문짝 자체는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다.
멋지다!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_<
0123
위 사진에 보는 회랑의 벽화도 다 찍었지만 이건 관심있는 사람에게만 재미있을 테니 생략. 법당 안으로 들어가면 스님이 북을 두드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뭔가를 읊고 있는데, 이것도 그리 불교적인 느낌은 나지 않는다. 네충 사원이 뵌교를 흡수한 흔적이라고는 하지만, 산신각 같은 한국 불교의 샤머니즘 흡수 형태와 비교해도 특색이 강하게 살아 있다.
늘 그렇듯 지붕에 꾸역꾸역 올라가서 내려다본.
그렇게 즐겁게 돌아보고 시계를 보며 그래도 데뿡까지 올라가보기로 할까- 하던 찰나.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하루 비가 오면 다행이라던 동네에서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계속 우산 없이 버티던 나로선 별 선택의 여지도 없고, 걸어 나가다가 돌아가서 사원 지붕 아래에서 비를 그었다. 계속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다녔더니 이렇게 멍하니 앉아있는 것도 오랜만이라 좋더라. 꽤 깨끗한 옷을 입고 머리를 방울로 묶은 여자아이가 나를 보더니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저었다. 몇 번 더 조르길래 눈을 똑바로 보고 한국어로 말을 걸었더니 부끄러운 듯 눈을 피한다. 비가 그치고 나서 터덜터덜 계단을 걸어 내려가다가 돌아보았더니 손을 흔들었다. 글쎄, 이 아이는 그렇게 힘들게 사는 집 아이 같지도 않던데... 그저 손쉬운 돈벌이라 해보는 걸까.
소들이 두두두 달려간다 싶더니 사미승이 쫓아나온다.
비가 그치고 나서 데뿡사원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니 도저히 올라갈 마음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시간도 슬슬 사원 문이 닫힐 즈음이다. 간덴사원에도 갈 테니 굳이 볼 필요 있겠는가 싶어서 걸음을 돌렸다. 터덜터덜 아래로 내려갔더니 마침 301번이 보인다. 냉큼 탔다. 어라? 낯익은 얼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아까 그 운전사와 보조운전사, 안내원이다. 방긋 웃었지만 이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여전하다. 왜 그런가 했더니.
또 잘못 탔다 OTL
종점 방향으로 가는 차를 탄 것이다. 아하하하하. 멋쩍은 웃음을 날리며 종점에서 기다렸다가 돌아서 시내까지 쭉 앉아있었다. 서로 말은 안통하지만 웃기는 많이 웃었다. 역시나 사람들이 친절했다 호호호 -_-
숙소 부근까지 갈까 하다가 야크호텔 앞에서 내렸다. 그렇다고 뭐 다른 일을 한 건 아니고, 어쩔까 생각하다가 다시 301번을 잡아 탔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쪽 종점(반환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서 아침에 버스를 탔던 바로 그곳에 내렸다. 아하하하. 이번에도 301번 아저씨는 친절했다. 음. 나중에 301번 아저씨끼리 내 얘기 한 거 아닌가 몰라. "커다란 모자 쓴 외국애라면 우리 차에도..." 하면서;;
뭐. 적당한 삽질은 여행의 양념... 이 아니라 없으면 섭섭한 것.
내려서 걸어가다가 슈퍼에 들러서 과자와 초콜렛 등을 사들고 숙소 귀환.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사장님 두 분이 거실에서 열심히 뭔가 보고 있다. 프리즌 브레이크다! 어차피 시작한 지도 좀 된 것 같아서 드라마 삼매경에 빠진 방사장님을 두고 부엌에서 맑은술님과 마주앉아 라면을 안주로 맥주를 두 병 비웠다. 그리고 저녁. 전투식량팀이 먼저 돌아왔다. 여행사 투어다보니 짧게 보고 돌아온 모양. 중학생 아이만 멀쩡하고 어른 셋은 두통에 시달렸단다. 어쨌든 이 분들은 마지막 날이라, 맥주를 한 박스 사다가 호기롭게 마시기 시작했다. 나도 조금 전에 마시지만 않았으면 합류했겠지만 그냥 과자를 먹으며 프리즌 브레이크를 보기 시작했다. 라싸까지 가서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재밌긴 재밌더라. 보고 있으려니 계속 보게 되더군. 5편까지 거기서 봤다. 굳이 한국 와서 더 찾아보게 되진 않았지만...
그리고 더 밤이 되어 CH님과 창원 커플도 돌아왔다. 정말 좋았다 하시더라. 원래는 다음날 나 혼자 버스를 타고 간덴 사원에 가볼 예정이었는데, 창원 커플 두 분이 택시 대절해서 간다 하셔서 그쪽에 붙기로 했다. 다음날 알게 되지만 엄청나게 잘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CH님은, 구하기 힘들어서 고생하던 기차표가 일찍 나와서 다음날 떠나신단다. 밤에 몇 번 이야기를 나눴지만 라싸는 맘이 참 불편하다고,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던지라 할 말이 없었다. 나중에 간덴과 남쵸를 겪고 나니 CH님은 티베트의 베스트를 못보셨구나 싶어서 안타까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