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느닷없이 표를 끊고 나가사키에 가게 된 생각의 경로는 단순하게 적자면 한 줄, 길게 적자면 한 바닥이다.
올해는 일이 많았고, 일을 많이 했고, 그만큼 나들이를 가지 못했다. 연말 연초에도 아직 할 일이 쌓여 있는데 의욕이 바닥을 쳤다.
어디 잠깐 부담없이 다녀올 만한 곳이 있나 비행기표를 검색했다. 비자 절차가 없고, 가깝고, 편하고, 음식이 맛있는 곳... 지금 사도 비행기표가 싼 곳.
삿포로(홋카이도), 나하(오키나와), 마카오, 마닐라, 후쿠오카 정도가 나왔다.
가보지 않은 곳을 고른다면 마닐라지만 이건 망설이다가 패스. 홋카이도는 다녀온 지 오래지 않았으니 패스.
마카오...흠, 마카오는 다시 갈 때는 누군가와 같이 가고 싶다고 생각했으니 패스.
오키나와와 후쿠오카를 보다가 문득 큐슈는 10년 전에 스치기만 했고 나가사키에 가보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앞 포스팅에서 잠깐 투덜거렸지만 나가사키가 매력적으로 비친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전차가 다니는 도시라는 점과 원폭자료관 때문에 히로시마와 비슷한 도시를 기대했고, 역시 전차가 다니는 도시라는 점과 무역거점 개항이었다는 점에서는 하코다테를 연상했다. 두 도시 다 워낙 첫인상이 좋았던 도시라, 나가사키도 그런 느낌이라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있어도 좋겠구나 싶었다.
야경 이야기를 하면서는 실컷 불평했으니 당연히 반전이 있었다고 적었지만,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없다. 나가사키는 나쁘지 않은 도시였지만, 히로시마나 하코다테처럼 사랑스러운 도시는 아니었다. 다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내 실망은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겪은 실망일 뿐. 순서를 거꾸로 잡고 나가사키에 제일 먼저 갔다면 훨씬 좋아했을 거다.
여기서 또 웃기는 건, 여행다니면서 전차가 주 교통수단이었던 도시를(멜번, 리스본, 포르투, 이스탄불, 히로시마, 하코다테, 나가사키 정도였나) 좋았던 순서대로 꼽으라면 나가사키가 상위권은 아니건만, 정작 전차 사진은 제일 많이 찍어왔다는 사실이다.
고토마치 정류장
원폭자료관 앞
평화공원 앞
데지마 앞
나가사키역 앞 정류장 (고가도로를 통해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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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이는 전차가 앞서 거론한 도시들보다 훨씬 예뻐 보인다면 그건 내 사진기와 사진실력이 좋아졌기 때문...만은 아니고,
다른 도시보다 작고 귀엽고, 색도 예쁘게 칠한 데다 고풍스러운 맛이 있구나.
(이쯤에서 믿을 수 없는 기억력을 환기하기 위해 히로시마 전차 사진 소환)
(그리고 그나마 히로시마에서 한 장 찍은 걸 제외하면 리스본에서도, 포르투에서도, 멜번에서도, 이스탄불에서도 전차길만 찍고 전차를 안찍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흐억)
그러고보니 히로시마 전차가 나가사키보다 예쁘달 수도 없고 고색창연한 맛은 나가사키 전차에 더 있는데, 왜 히로시마 쪽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나... 생각해보니 결국 전차 자체가 아니라 그 전차를 타고 다니는 도시가, 창밖 풍경이, 그 도시의 경험이 인상을 좌우하는구나. 물론 내 기억 속의 히로시마는 10년 전의 도시니 지금은 또 다를 지 모르겠다만. 언젠가 이 사진들이 내 기억을 왜곡할 지 모르니 한 번 더 적어둔다.
나가사키 전차: 한 번 탈 때는 어느 노선 몇 구간이나 120엔. 하루 종일 자유 이용은 500엔 (나가사키역 관광안내소에서 구입)
12월 8일에는 자유이용권을 사서 하루 종일 전차를 타거나 걸어다녔다. 헤메다닌 길거리는 또 다음 포스팅에.
- 2015. 12. 08 나가사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