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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7코스, 강정마을

한국/제주

by askalai 2015. 11. 14.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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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을 걷고 나서 아무 말 없이 사진만 올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막상 적자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적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며칠이 그냥 흘러갔다. 



나는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곳을 볼 수도 있었다.

볼 수도 있었는데, 보지 않았다. 2009년 일기를 보면 7코스를 절반 걷고 나서 7-1코스로 빠졌고 막판에 아파서 그나마도 끝까지 걷지 못했다.

도중에 택시를 타고 돌아간, 드문 날이었다.

7코스 후반부는 나중에 볼 날이 있을 줄 알았다. 


강정마을의 지난한 싸움은 그 후에 언론에 잠시 오르내렸고, 나는 멀리서 지켜보았다.

별로 도움이 되진 못했다. 가끔 후원금을 내거나 후원물품을 샀다. 


몇달 전, 친구 M이 제주도에 다녀와서 그런 말을 했다. 제주도에 자주 다녔지만 이번에 강정에 처음 갔다, 정말 아름답더라,

굳이 여기에 해군기지를 만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고.

(그 친구에게는) 처음으로 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조금 말했고, 

친구는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말했다. "너 환경주의자였구나?"


...그 표현부터 참 생소했지만, 환경주의와 생태주의 차이부터 늘어놓을 수도 없고,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몰라 웃고 말았다. 

원래 관심사가 겹치지 않으면 말을 먼저 꺼내지 않는 편이라, 

이십년 친구인데도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게 그 녀석 탓만은 아니다.


그 후에 생각을 해봤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말고, 바로 그 친구같은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어느 정도라도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혹은 그 친구보다 더 이 일에 관심없는 사람에게라면? 


*


제주도에 다시 가는 김에 강정마을을 걷자고 먼저 말한 사람은 다섯 번 올레길을 함께 걸은 E양이었다. 

반가운 얘기였고, 지금도 결과적으로는 가보기를 잘했다고 고맙게 생각하지만,

걷는 동안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벗어난 후에도 그 문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걸음만 빨라졌다.  




법환포구에서부터 걸어서 슬슬 강정항이 보이기 직전








풍림리조트(지금은 켄싱턴)에 자리한 바닷가 우체국

...그다지 크지 않은 이 풍림리조트 지을 때도 강정마을에서 공청회를 여덟 번은 열고 동의를 구했다던데. 
















공사는 사진에 담기지 않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바쁘고 무관심하게 진행되고, 마을은 지쳐서 햇빛 아래 누워 있었다. 목이 졸리는 폭력 현장이었다. 

저 해군기지가 완성되고 나서 가보면 언제 그런 마을이 있었냐는 듯이 생소한 풍경만 남았겠지.




나는 환경주의자인가? 그래서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공사에 반대하나? 단지 그런 사람들만 이 공사를 반대할까?  

환경주의보다는 생태주의라는 말을 조금 더 선호하고 아예 무슨 주의자라는 말이 붙는 게 탐탁치 않기는 하지만, 

세상이 조금 더 공생을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 불편을 좀 감수해도 좋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 공사에 대한 반대 이유는 아니다. 


그래, 분명히 이 대규모 공사는 구럼비와 강정마을과 그 일대 바다를 망가뜨린다. 

경제적인 면을 보더라도 돈 주고도 못살 자원을 파괴한다. 

이 해군기지의 실효성을 매우 의심하고 있기도 하고, 지금 걷는 군사 노선이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설령 어딘가에는 지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 해도, 지금 일어나는 일에는 반대할 수 있다. 


잠시 머무는 곳이라 해도 내 뜻에 반하여 쫓겨난다면 고통스러운 법이다.

익숙한 세계가 무너질 때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일을 심지어 신뢰가 가지 않는 태도로, 강압적으로, 반대하기만 하면 모종의 다른 목적이 있는 '반대 세력'으로 몰면서, 밀어붙인다. 

제대로 동의를 구했어야 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고, 왜 이미 통과된 일에 반대하냐며 벌금을 물린다.

내가 당한다면 그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인가? 

각자의 이유로 먼저 찬성했다가 힘들어진 분들도 포함해서, 그 상처과 골을 안은 채로 대대로 산 마을을 잃어버리는 건 또 어떤가?


...M은 나와 달리 걷기를 싫어하고, 개발에 반대하는 성향도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가 생각 못한 말을 해준다. 

"내 생각엔 말이야, 거기로 해군기지를 정한 게 그래서인 것 같아. 주민도 얼마 안되고, 큰 회사나 조직도 없으니까. 힘이 없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나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 



사족이지만 내가 "환경주의/환경주의자"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 말 자체가 세상을 인간과 환경으로 나누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다와 바위와 마을 사람들의 삶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를 하찮게 보는 사람은 흔히 다른 것들도 가볍게 여긴다.




미친 듯이 빨리 걷고 겨우 공사장을 뒤로 하고 나서야 숨통이 트였다.  








월평으로 가는 길에 구름 얹은 한라산이 가까이 보인다. 


원래는 오후까지 걸릴 줄 알았는데, 하도 급하게 걷다보니 이른 시간에 월평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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