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일본행을 결정했을 때 그 계획 속에는 교토와 히로시마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사카 왕복 비행기표를 바로 구하지 못했고, 히로시마와 교토는 상당히 멀었다. 그런 상태에서 지도를 들여다보는데 문득, 후쿠오카-히로시마-교토가 한 라인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OK! 후쿠오카 쪽으로 들어간다면 비행기표 구하기가 쉽겠지? 기왕 가는 김에 후쿠오카도 들르지 뭐. -> 기왕 후쿠오카까지 가는데 온천도 해야지. 개중 가까운 게 벳부(別府)니까 벳부만 들렀다 올라가자.
...몇초동안 이런 생각이 머리속을 흘러간 다음, 어느새 일정은 후쿠오카 인, 오사카 아웃으로 굳어져 있었다. 하하. 그다지 효율적인 동선이라 보기는 힘들지만 어쩌랴(으쓱)
2월 4일 오전. 인천 공항에서 1시간 조금 넘게 비행기를 타고 가서 아담한 후쿠오카 공항에 내렸다. 이곳에서 벳부로 바로가는 고속버스(2000엔)를 타고 2시간. 창밖으로 가끔 눈쌓인 산야가 스치더니 마지막 굽이를 돌자, 서일본 최대의 온천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수증기가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작은 도시가 내려다보인다.
'유명한' 온천도시라는 점 때문에 거의 기대를 걸지 않았건만, 벳부는 생각보다 소박하고 조용한 도시였다. 물론 거의 시골 마을이나 다름없는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쇼핑센터들이 있는 것은 휴양지다왔지만, 금요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적고 그만큼 떠들썩한 데가 적었다.
벳부 중심가에서 찰칵
버스에서 내려 짐을 끌고 큰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어디엔가 추천이 올라와 있던 온천장을 찾았다. 혹시나 싶어 예약 없이 가봤지만 역시나. 싸고 괜찮은 숙소에 방이 몇 개 없으니 자리가 남아있을 리 없다. 할 수 없이 JR 벳부역까지 올라가서 관광안내소에 문의, 약간 위쪽에 있는 숙소를 잡았다. 이름은 花月. 낡아서 싼 곳인데도 숙박비가 3000엔이 넘는다. 역시 물가가 비싸 OTL
어쨌든 숙소는 괜찮았다. 딱 하나, 추웠다는 점만 빼면 -_-;;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더 추울 리가 없는데, 게다가 규슈는 남쪽인데도 예전에 여행갔던 친구들이 다 생각보다 춥다고, 스며드는 추위라 하더니만, 그 이유 하나가 이것이었나보다. 일본에는 온돌이 없잖아! 그런 당연한 사실을 왜 생각하지 못했는지. 대신 내내 이것만 끌어안고 지냈다.
부제: 코타츠의 비밀. 탁자 밑에 달린 램프가 열기의 원천.
...사실은 코타츠에 정신이 팔려서 삽질을 하는 바람에 더 춥게 잤다(쿨럭)
아무튼 자리 잡고 온천으로. 괜찮아보이는 온천 몇 곳 중에 나머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할 위치에 있고, 하나는 너무 작고 해서 1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한다는 다케가와라 온천으로 결정. 길 양쪽을 슬슬 구경하면서 내려가다가 타꼬야끼를 사먹었는데 이게 또 끝내주게 맛있어서 기분 업 ^^~ 오사카 쪽과 달리 가다랭이포를 얹지 않더군. 그대신 이름모를 녹색 가루가 듬뿍.
다케가와라 온천 앞. 오래된 목조 건물에 지붕은 대나무.
온천 앞길.
물이 좋아 유명하다고는 해도 사실 공중목욕탕인 셈인데, 그냥 온천욕은 100엔. 모래목욕은 1000엔이다. 모래목욕을 선택하자 한 번에 두어 사람씩만 한다며 좀 기다리란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역시나... 여기도 추웠다 onz. 넓은 나무마루에 석유난로만 두 개 켜놓아 썰렁하기 그지없다. 온천이면 당연히 따뜻할 줄 알았건만! 그런데 저기 젖은 머리로 나온 사람들은 어째서 맨발로 아무렇지 않게 다니는 거지? 우리만 추워하는 건가?
등등의 의문은 실제로 온천을 해보자 풀렸다. 흠.
일단 유타카로 갈아입고 들어가서 고개만 내놓고 온몸에 뜨거운 모래를 끼얹어준다. 일하는 아줌마들이 삽질을 하는데 어쩐지 생매장당하는 기분. (우리나라에도 이런 거 하는 데가 있다지만 사실 난... 온천을 안해봤다;;) 온몸을 꼼꼼히 덮고 10-15분...이라지만 우리는 땀이 안난다며 모래를 20분이나 놔뒀다. 일어나서는 바로 옆에 딸린 작은 온천에서 샤워로 모래를 닦아내고, 물에 들어간다.
크악! 뜨겁잖아!
물이 어찌나 뜨거운지, 겨우 들어갔다가 빨갛게 익어서 나오고나니 한참동안 몸이 훈훈하다. 과연, 이런 식으로 몸을 덥히고 잠자리에 들었던 건가. 갑자기 예전에 읽은 일본 농촌에 관한 현지조사 보고서가 떠오르는 순간...(아련)
아무튼 온천욕을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또 슬렁슬렁 거리를 돌아보다가 저녁은 '역전 라면'집에서 해결. 이것도 무진장 맛있었다. 여행 중에 라면을 세번쯤 먹었는데 유명하다는 오사카의 금룡라면보다 여기가 더 맛있었다는. 역시 사전정보가 없는 경험 효과일까?
차슈라멘. 생각해보면 일본 라면을 처음 먹었을 땐 느끼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많이 익숙해졌구나...
숙소에 들어가면서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샀다. 가기 전에 모양이 추천한 산토리의 몰츠malts. 추워서 코타츠에 발을 넣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맥주캔을 따서 한모금 넘기는 맛이라니... 눈물나게 맛있었다! 몰츠를 먹어보고 나니 기린이나 아사히, 삿뽀로 맥주가 눈에 들어오질 않더라. 웅묘양 고맙소 -0-
첫날은 춥게 잤다는 점만 빼면 퍼펙트하게 마무리. 다음날은 벳부의 자랑이라는 지옥순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