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9일.
푹 자고 역시 6시 반쯤 눈을 뜨니 비가 오고 있었다. 심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부담없이 나갈 만한 정도도 아니라서 조금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뭐, 비 덕분에 에어컨을 켜지 않아도 전혀 덥지 않은 밤을 보낸 것도 사실.

저녁에는 오사카로 뜰 예정이었기 때문에, 비 때문에 남은 교토 일정을 망칠까봐 걱정이 많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7시 반쯤 짐을 지고 숙소를 나설 무렵에는 빗발이 많이 약해졌다. 비가 또 쏟아질까 두려워, 역 코인라커에 짐을 넣고 곧장 기요미즈데라로 향했다. 원래 일정상으로는 나중에 가기로 했던 곳이지만, 기대가 큰 곳이니만큼 개어있을 때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J양은 전날에 이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탓에 좀 정신이 없었지만 어쨌거나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은 덕분에 힘좋게 고갯길을 올라가, 기요미즈데라 앞에 도착하니 정확히 아홉시. 문 열 시간이다!
기요미즈데라(靑水寺)는 780년에 세웠다가 17세기 재건한 목조 건물로, 절벽 위 아찔하게 서 있는 본당 건물이 최고의 자랑이다. 금각사와 더불어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코스 중 하나면서도 친구들 모두 칭찬을 아끼지 않은 곳이기도 했으니, 기대가 얼마나 컸겠는가. ^^ 다행히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곳이었다.
인왕문은 보수 중이었고, 일본에 드물게 보이는 단청이 영 촌스럽고 조잡하게만 보이는 삼중탑을 지나고 나니 이제야 드디어 무채색이 더욱 품위있어 보이는 본당 건물. 이때까지 본 절 지붕 중에서 가장 곡선이 많은 점이 눈에 띈다. 용을 본뜬 지붕이라던가. 본당 앞을 지나 본당이 잘 보이는 난간으로 이동해서 보니, 날이 완전히 개지는 않았지만 비는 그친 상태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지붕 끄트머리며 쪽 고르게 뻗은 나무들의 모습이 상쾌하다. 역시 시간이 이른 덕에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금상첨화.
청수사 표. 실제는 이보다 색감이 좋다 빳빳한 재질이라서 책갈피로 쓸 수 있을 정도

본당

난간 부분 확대. J양이 사진을 정말 잘 찍었다. 위태해 보이기만 하는 난간은 본당 지붕과 함께 기요미즈데라의 자랑 한동안 다리를 쉬면서 전경을 감상하다가, 즐겁게 계단을 내려가서 받아마시면 장수한다는 물도 한 번 받아보았다. 여긴 사실 낮에 오면 사람이 워낙 많아서 기다리느라 시간 다 간다는 곳이지만, 역시 아침에 온 덕분에...게다가 아침에 비가 내린 덕분인지 물줄기가 꽤 세어 물을 받아보기가 쉬웠다. 뭐, 장수한다길래 받아보기만 하고 마시지는 않았지만(...)
자, 그리고 기요미즈데라를 나서면 고갯길을 따라 좌악 늘어서 있는 기념품 가게들! 기요미즈데라가 최대 관광지인 이유는 비단 절 자체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곳의 기요미즈자카는 물론이고 이어져 있는 산넨자카, 니넨자카는 유명한 옛 쇼핑가다. 가게도 워낙 다양하고 물건도 많을 뿐더러, 산넨자카/니넨자카 쪽으로 가면 값이 비싸지는 대신 가게 자체가 운치가 있다. 여하튼 올라갈 때는 막 문을 열고 있던 가게들이 내려올 때 보니 다들 준비 완료 상태. 가게들을 기웃거리다 보니 생각지 않은 물건들을 선물이라며 사버리게 된다 ^^;; 과연, 친구들이 왜 도쿄의 아사쿠사에서 기념품 사지 말라고 말렸는지 알 만하다.
부채며 술잔, 병, 컵, 게다가 마이코(예능 기생...중에서도 수련생이라고 해야 하나?)를 상표처럼 내세워 그린 기름종이, 온갖 만주에 과자, 모찌, 앙증맞은 부적들에 인형, 거울, 빗, 복신 인형......기념품으로 가능한 물건은 모두 다 활용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그것도 여기에서만 볼 수 있고 교토 내 다른 가게만 가도 없는 물건들까지 있으니 관광객의 마음이 혹하지 않을 수가 없지. 게다가 아주머니들이 말은 안통해도 참 친절해서...이래저래 선물을 좀 사고 말았다. 짐을 늘이고 싶지 않아서 원래는 마지막에 사려고 했건만;;
물건은 싼 가게에서 사고, 산넨자카 쪽으로 빠져서 가게 구경. 특히 인형들이 근사한 게 많았다. (...내가 근사하다고 하면 꼭 예뻤다는 뜻은 아니다)

산넨자카, 역시 엽서사진 자, 그래서 오전을 알차게 보내고 교토역으로 직행.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맥도날드에 들어갔다. 대체 왜 일본까지 와서 맥도날드 같은 데를 가나 싶었더니만, 알고보니 맥도날드에서 버거를 먹는 값이 편의점에서 주먹밥에 빵, 과일을 사는 것보다 싸게 먹힌다. 뭐, 음료수는 비싸지만. 아무튼 그렇게 먹고 걸어서 갈 수 있는 히가시 혼간지로.
히가시 혼간지(東本願寺)는 목조 건물로는 일본 최대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본당을 자랑하는 절로, 관광지라기보다는 여전히 절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라 입장료가 없다. 그래서 교토 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는 곳이라는 절이다. 그러면서도 내부 건물 여기저기에 스탬프를 마련해놓고, 네 군데를 다 돌면서 스탬프를 찍어오면 기념품으로 예쁜 금속 책갈피를 주기 때문에 관광객들에 대한 서비스도 만점 ^^ 솔직히 공짜라지만 입장료 비싼 관광지보다 더 좋으면 좋았지 못하지 않았다. 늘 오전에는 사진기를 들고 마구 찍다가 오후가 되면 팽개쳐버리는 습성 탓에 사진은 변변히 없지만(...) 건물 외관도 상당히 볼만하다.
정말이지, 스케일 끝내주는구나 싶을 정도로 크고 넓은 본당 건물의 지붕 아래에서 맨발로 앉아 빈둥거리니 기분 최고였다. 아직도 히가시 혼간지 생각이 난다 ^^ 이쯤 되어서는 날이 제법 개어, 히가시 혼간지의 거대한 목조 건물 안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움직이지 않으려는 발을 떼어 네 군데를 다 돌아보다 보니, 이 절의 바깥 건물은 유서깊은 건물인지라 철저히 관리를 하고, 실제 법당과 강당 같은 건물은 모두 지하로 파들어가 있었다. 정말 머리 잘썼다 싶은 순간.
하긴 스탬프만 해도 그렇다. 사실 그게 얼마나 하겠는가, 기껏해야 고무도장과 인주만 가져다 놓을 뿐이건만. 관광객 입장에서는 그거 하나 찍어가는 게 정말 기념이 되고 기분이 좋단 말이지. 상품화에 꼭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기왕 하려면 그 정도 센스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 우리나라의 예를 생각하니 아쉽기 그지없다.
히가시 혼간지와 쌍을 이루는 니시(西) 혼간지는 공사 중이어서 패스. (S양이 히가시보다 더 좋다고 했던 곳이라 안타깝지만. 아무튼 히가시와 니시는 각기 다른 분위기를 자랑한다 한다)
아무튼 그렇게 볼 게 많지는 않았지만 (아, 머리카락을 꼬아 만든 밧줄이 있었군 긁적)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미적거리다 보니 2시 반.
동선을 어찌 잡을까 한참 망설이다가 일단 산주산겐도로 향했다.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본당 건물의 기둥 사이에 서른 세 칸에 달하는 공간이 있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그러니까 건물이 무척이나 길다. 그리고 이곳의 입장료는 비싸다. 비싼 이유? 이유야 확실하지. 내부에 천 한 구의 금동 천수관음상이 있기 때문이다. 1001개의 비슷비슷해 보이는 관음상. 그러나 잘 뜯어보면 얼굴이 모두 다르다.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역시 엽서사진
...라는 것인데, 보고 나서 왠지 무한정 피곤해지는 곳이었다. 이런 건 하루 잡고 여기만 보면 모를까, 시간 쪼개어 보기에는 아무래도 힘들다.
산주산겐도를 나오니 왠지 무척이나 피곤해져서, 다음에 어디로 갈지 다시 망설였다. 원래는 교토 박물관을 볼 생각이었지만...차라리 절이나 하나 더 보는 게 어떠냐는 생각이 든 것. 결국 의논 끝에 박물관에 좀 더 미련이 있는 나는 박물관으로, 같은 시간에 J양은 도후쿠지로 향했다.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일단 특별전으로 향했는데, 가마쿠라 시대의 어느 신사에서 나온 목조 조각품들이 한가득. 목조 조각은 좋아하지만 역시 뭐가 뭔지 몰라서야 재미가 없다. 죽 훑어만 보고 전시실로 걸음을 옮기다. 여기엔 공짜 라커가 있어서 짐을 놓고 돌아볼 수 있었다. 다 보는 건 무리니까 일단 꼭 봐야 할 전시실을 정해놓고...선사시대 토기, 도자기, 불상을 보고 위로 올라가서 서화는 통과, 기모노 전시를 보고 옆으로 넘어가니 이게 왠걸. 제일 보고 싶었던 마키에 전시와 금속공예실이 기획적으로 바뀌어 중국 자개/칠기와 동경만 전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결국 마음에 찬 전시는 불상 뿐이었다. 여의륜 관음상이 마음에 들었다.
국립박물관 치고는 규모가 작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일본은 국립박물관이라고 해도 레플리카가 대부분이고 실물은 잘 내놓지 않는다더군. 쓰...
아무튼 다시 내려가 보니 정문 앞에 스탬프 찍는 곳이 있기에 찍고 밖으로 나가서 J양과 조우.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교토도 이제 안녕이었다. J양과 나는 아쉬움을 접고 역으로 돌아가, 가방을 짊어지고 오사카로 향했다.
...그러나, 우린 결국 다음날 교토로 다시 돌아오고야 만다.
교토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오사카에 도착하면서부터 들었다. 이틀동안 교토 분위기에 너무 젖었던 걸까. 오사카의 시끄러움이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 거다. 게다가 이런저런 악재가 겹쳐서 저녁도 먹지 못한 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상태. 계속해서 길을 헤메고 (지난번엔 혼자서도 잘 갔던 길을!) 겨우겨우 선 플라자 호텔에 도착했더니만 예약해놓은 게 어디로 날아갔는지 방이 없단다. 뭐, 워낙 싸고 그런 숙소다보니 결국은 방을 내줬고...그것도 1인실을 둘이 쓰게 해줘서 숙박비는 엄청나게 싸게 들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온 것을 어쩌리. 투덜거리다가 결국은 저녁을 먹으러 오사카 시내로 나갔는데, 또 헤메고 또 헤메서 9시나 되어 겨우 긴류(金龍) 라면집을 찾아내고 말았다. 기진맥진해서 먹은 라면은...과연 추천받을 만큼 맛있긴 했지만. 도쿄를 떠날 때 E양이 필히 가서 먹어보라고 나를 잡아 흔들었던(E양은 예전에 왔을 때 먹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 긴류라멘은 오로지 라면밖에 팔지 않는 24시간 라면집. 마늘이 들어간 담백한 라면이라서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 데다가, 김치(진짜 김치!)가 서비스로 나온다. 효율을 최대한으로 하기 위해 주문은 자판기로 대체하고 메뉴도 간소화해놓은 점이 포인트랄까. 뭐, 어쨌거나 과연 맛은 있었다. 오사카에서 좋은 기억은 오직 이 라면집 뿐일 정도로;;;
덕분에 다시 숙소로 돌아갔을 때는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려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다시 교토에 돌아가고 싶어진 건, 샤워시설! 일찍 들어가면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다지만 우리가 일찍 들어갈 리도 없고, 코인샤워기가 있으니 어떻게 되겠지 했지만, 말하지 않았는가. 악재가 겹쳤다고. 동전을 먹어버리질 않나, 실수를 하질 않나, 동전 구하러 밑에까지 내려가서 물을 사오고 부산을 떨어가며 겨우겨우 씻고 나니...이 숙소에 이틀 밤이라면 또 몰라. 여기서 사흘은 있고 싶지 않다! 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쁠 이유도 없었는데...이상하지. J양이나 나나 오사카와 기가 맞지 않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