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 막고굴
막고굴(莫高窟)은 어쩌면 돈황에서 명사산보다 더 유명한 이름일 것이다.
실크로드의 거점도시라는 효용을 잃고 쇠락한 돈황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게 19세기,
당시 이 쇠락한 석굴을 지키던 왕원록이 장경동에 숨겨져 있었던 문서고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문화적, 미술적인 가치는 전혀 모르고 그저 불교석굴을 복원하는 것만이 비원이었던 왕원록은 스타인과 펠리오 등에게 돈을 받고 무수한 유물을 팔았고,
그래서 그 많은 문서와 그림들은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에 가 있다.
[실크로드의 악마들] 같은 책을 보면 19세기에 '탐험'과 '보존'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약탈이 이루어졌는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데;
당시 고고학자 아닌 보물수집가이자 도굴꾼으로 자국의 힘을 등에 입고 활약했던 그 탐험가들은 벽화를 돌째로 뜯어가고,
화학약품으로 그림을 떼어내는 실험 등을 자행했고 그 결과는... 당연하게도, 별로 좋지 않다.
파헤쳐지고, 화학약품에 색이 바랜 지금의 석굴 벽화도 가슴 아프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서 뜯어낸 유물이 엉뚱한 박물관에 있다고 원래만큼 아름다울까.
그 후에 벌어진 복잡한 역사를 보라, 그 덕분에 파괴와 훼손을 많이 면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기는 하다.
뭐, 역사에 가정을 해봐야 어찌하리. 다만 순수하게 보존을 위해서였다면 괜찮아진 후에는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항변이 가능하겠지?
재미있는 건, 실크로드에서 약탈당한 유물의 일부는 우리나라에도 와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당시 조선인 중에 그런 탐험대가 나왔을 리는 없고, 한 발자국 늦었던 일본 탐험대가 쓸어온 유물을 조선총독부에 둔 채로 철수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지금도 국립박물관에 가면 실크로드관에 가서 그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사실 이번에 돈황에 가면서 막고굴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20년 전, 10년 전까지만 해도 관광객들이 꽤 자유롭게 다가가서 볼 수 있었고
꽤 많은 굴이 열려 있었다지만-
지금은 가이드 없이 개인행동은 아예 금지되어 있고, 많은 굴이 보존을 위해 폐쇄되고 있으니... 별 감흥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생각을 뒤집고
비즈니스센터에서 상영하는 아이맥스 영화 + 비즈니스센터에서 막고굴까지 셔틀 왕복 + 막고굴 입장료 + 외국인 가이드
다 합해서 총 170위안, 이 비싼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비즈니스 센터. 표는 시내 판매처에서 미리 구매했다.
이런 방식으로 완전히 바뀐 게 2014년 8월부터라 한다.
센터 내부의 기념품점도 훌륭하다. 이번 여행은 물론이고 이제까지 내가 가본 거의 모든 곳을 통틀어도 손꼽을 만큼 탐나는 물건이 많았다.
이런저런 시간 문제로 작은 가방 하나밖에 못사서 두고두고 아쉽 ㅠㅠ
아무튼 그 동안 번 돈으로 비즈니스센터를 건축, 거기서 여러 석굴 내부를 촬영해서 만든 디지털 아이맥스 영상을 두 개 틀어주면서 시작하는데
보존을 위해 굴을 많이 폐쇄했고, 앞으로 더 폐쇄할 예정이라 그 대신이랄까... 그런 느낌.
그런데 이게 예상을 뛰어넘는 걸작이었으니.
입체감 제대로다. 진짜 석굴 안에 들어가서 가까이 그림을 보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또 보고 싶을 정도...
유물 보존을 위해서라면 이것도 괜찮은 방법 같다. 우리 석굴암도 이런 거 만들어볼 만 하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 나면 셔틀을 타고 2, 30분 이런 황무지를 달린다.
드디어 석굴군이 나타났다. 이 모래산 역시 명사산이다. 전날 보고 올라갔던 고운 모래산의 반대편, 사암 지대.
1층은 보수한다고 시멘트를 발라서; 습기 문제를 야기했다지만...
(어쩌면 이런 것까지 똑같을까. 모두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 위는 예전부터 이 모습이라니 묘한 기분. 막고굴의 역사는 거의 서기 3세기쯤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말이지.
성수기라면 주위는 녹색이고, 사람이 바글거렸을 테지만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간 때는 비수기.
중국인 관광객이 한 무리 있었고, 외국인은 영국인 커플과 우리 합해서 딱 네명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따로 한국인 가이드를 구하지 못하고 영어 가이드에 얹혀 갔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전화위복이었던 듯 하다. 어차피 외국인 가이드는 모두 원래 가이드가 아니라 돈황 연구센터 직원이다.
한국인 가이드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연구원이라는 건데, 썩... 한국어에 능통하지는 않은 모양.
우린 굉장히 뛰어난 영어 설명을 딱 네 명이서 들으며 차분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내부 사진은 금지라...
위의 두 사진이 비슷해 보일 테지만, 대불상이 놓인 누각도 두 개다.
위 사진의 대불은 들어가서 볼 수 없는 대신 아이맥스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고,
아래 사진의 대불은 관람 가능하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성형 부처로 조성했고,
그 후 수많은 황제들이 손을 대어 지금 남은 벽화나 손과 발 같은 부분들은 청나라 대까지 내려온다고 한다.
*
기분좋게 관람을 마치고 돈황 시내로 귀환하니 해질녘이다.
돈황도 야시장이 유명하다. 이름하여 사주시장...
그러나 몇 번째인지 모르게 또 말하지만 우리가 간 시기는 엄청난 비수기.
막고굴이야 사람이 적어서 좋았지만 시장은 사람이 적으면 썰렁할 뿐이다.
그래도 가끔 오는 단체관광객 때문에 문은 열어놓는 모양이지만, 영 재미가 없어서 실망.
그래도 돈황 명물이라는 당나귀고기면을 먹고 잠시 구경
실크로드니까 이런 물건은 다 다른 도시에서도 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은 무조건 그 자리에서 사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야광배 살걸!
썰렁한 사주시장을 미련없이 뒤로 하고, 숙소에 들어가서 맥주 한잔.
가게에서 사면 칭다오 맥주 한 캔에 600원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