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브존, 2012년 8월 9일
...농담 아니고 정말로 15시간 걸려서 동쪽 끝에 가까운 흑해 연안도시 트라브존에 새벽 6시경 도착.
버스가 15시간을 꼬박 달린 건 아니고, 터키 버스 시스템의 특성상 갈아타고(사프란볼루 구도시-사프란볼루 신도시라고 할 수 있는 크란쿄이 오토갈-좀 더 큰 카라뷔크 오토갈-트라브존 오토갈-트라브존) 기다리는 시간과 중간중간 휴게소 멈추는 시간 등이 더해져서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먼 길이다.
크란쿄이 시장에서 과일을 사는데 어떤 할머니가 청포도 하나를 손에 밀어넣어주며 친근하게 등을 두드리던 기억이 희미하다. 새벽녁에 밖이 밝아질 때쯤엔 졸다깨다 하면서 흑해를 본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고.
어쨌든 도착.
급하게 검색해서 점찍어둔 작은 호텔이 있긴 했으나, 체크인 가능한 시간까지는 밖에서 버텨야했다. 인터넷이라도 써보겠다고 24시간 여는 맥도날드에 들어갔는데 여기 맥은 인터넷이 안되더라. 패스트푸드도 맛이 없고. 그냥 눈을 비비며 노트북 켜고 일을 했다.
일하다가, 나와 비슷하게 도착해서 호텔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던 여행자들과 말을 나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쪽에서 나에게 말을 걸었지. 여자 셋에 남자 하나였는데, 실제로는 넷 다 원래 혼자 떠난 장기 여행자들이었다. 특히 여자 셋은 다들 나보다 길게(!) 여행하고 있었고, 스페인에서 순례자 길을 걷다가 만났던 인연으로 다시 연락해서 터키에서 다시 만났다던가. 뭐, 각기 만난 경로는 복잡하지만 결론은 지금은 셋이 같이 다니고 있었다는 것. (남자애는 한참 어린 대학생이었고 오토갈에서 만났나, 아무튼 만난 지 얼마 안된 상황...사실 이 친구는 이틀인가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갔다.)
체력좋고, 유쾌하고, 생활력 끝내주고 편안한 그녀들과는 여기에서 만난 인연으로 다시 이스탄불에 돌아갈 때까지 함께 하게 되지만... 그건 나중 얘기고.
당장은 여자 3인 큰 방+ 나 싱글룸+남자애 싱글룸으로 따로 방을 잡았고, 트라브존에서도 같이 다니다가 떨어졌다가 했다. 게다가 9일에는 뭐 다들 긴 버스여행으로 일단 체크인하자마자 뻗었고.
저녁 때가 다 되어서 우르르 모여 시내 구경. 해지는 풍경도 볼 겸 도시 전경도 볼 겸 보즈테페 언덕으로.
언덕까지 올라가는 돌무쉬가 바가지요금 씌우려고 했던 것도 같고 언덕 위 공원을 구경한 것도 같은데 다 희미하구나. 이래서 여행기는 그때그때 써야 하는 것...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어야 하니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제일 강렬했던 경험은 기억한다.
보즈테페 언덕에서 시내로 터덜터덜 걸어내려가다가 맞닿뜨린 자미.
그리고 자미 마당에 준비된 식탁들.
라마단 저녁식사! 부유한 자들이 돌아가면서 낸 돈으로 자미를 찾는 사람 누구에게나 저녁식사를 대접한다.
물론 우리도 감사히 끼어앉아 얻어먹었다. 아주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모두들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가, 해가 졌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기도하고 식사를 시작한다.
다들 친절하고 관대했고, 사진을 찍고 싶어했다(...)
터키 사람들은 사진찍기를 정말 좋아한다. 왜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와는 달리 붙임성 좋은 동행들과 함께 한 덕분에 밥도 잘 먹고, 사람들과 어울려 사진도 찍고 잘 놀았다.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터키여행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던 시간.
잠시 짬을 내어 자미 안에도 들어가보았는데,
여기는 이제까지 들렀던 도시들보다 엄격해서... 여자는 무조건 2층.
그걸로 끝이 아니고 1층이 보이지 않게 커튼까지 쳐놨다. 으음;
트라브존 야경
밝을 때 전경을 내려다보면서도 느꼈지만, 흑해 동부 연안의 중심지이자 대도시치고는 아담하다. 도시 인구도 40만명 정도이고. 터키도 지역차가 크구나...를 새삼 느꼈다고나 할까.
아참. 이 지역은 러시아와 가깝다. 한때는 남쪽의 이란과 북쪽 러시아를 잇는 실크로드 관문도시였다고. 심지어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애초에 트라브존이라는 도시 이름 자체가 고대에 밀레토스(그리스)인들이 건설한 무역 식민도시 트라페주스에서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