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남유럽

사라예보, 2012년 7월 4일

askalai 2013. 2. 20. 21:50

2012년 7월 4일-5일, 사라예보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기차로 아홉 시간을 달리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가 나온다. 발칸반도의 정중앙에 가까운, 그래서 옛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이기도 했던 도시. 내전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크로아티아 쪽 도시들과는 달리 아직도 전쟁의 흉터가 확연히 남아 있는 곳. 


물론, 대체로는 교과서에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실린 이름으로 더 기억나는 도시다. 



이제 슬슬 문화권이 달라진다. 그래서 도시 풍경도 달라진다. 발칸반도 북부는 이탈리아-헝가리의 영향권이었지만, 여기부터는 남쪽으로 갈수록 그리스-터키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도 카톨릭이 사라지고 동방정교회와 이슬람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풍경에 보는대로.




하지만 도착해서 이 길을 보기 전에.


앞 글에 적은대로 동행인 지은이는 7월 3일 플리트비체에서 자그레브까지 가는 3시간의 버스 여행도 너무나 힘들어했다. 내려서는 탈진해서 밥도 먹지 못하는 상황. 자그레브에서 사라예보까지 가는 야간열차는 아홉 시간, 당연히 침대칸 같은 건 없다. 예전 비둘기호 같은 열차의 낡은 쿠페 한 칸을 둘이 차지하고 누워 자는 게 최선인 상황. 


창백한 얼굴로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올 줄을 모르는 지은이를 기다리며 이거 쓰러진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돈보다 건강이지, 무리하지 말자고 결심을 굳혔더랬다. 하지만 그냥 자그레브에서 하루 자고 비행기 타고 가자고 했더니, 잠시 고민하던 지은이는 강행하자고 답했다. 


(아...이 때 나도 지치고 걱정하느라 그 기차를 찍어둘 생각을 못한 게 아쉽네. 쩝)


완전히 달아오른 기차에 오르는 순간 열기가 훅 끼친다. 창문이 조금 열리기는 하는데 고정이 되지 않아 커튼을 끼워서 고정시키려고 갖은 고생을 하다가 다른 칸에 탄 현지인 아저씨의 도움으로 바람은 겨우 통하게 해뒀다. 그러나 달리다보니 새벽에는 급속도로 차가 식으면서 오히려 추워져서 또 창문을 닫고 가방을 뒤져 옷을 껴입기도 해야 했다. 


불빛이라곤 없는 창밖이었지만, 달이 휘영청 밝았다. 



잠을 조금 자기는 했지만, 새벽 여섯 시에 내렸을 때 제정신이었을 리가 없다. 멍한 정신으로 예약해둔 숙소까지 택시를 탔다가 10유로인가 바가지를 썼다. 그만하면 그 멍한 정신에 다행한 셈이기도 하고, 주소만 쥐고 택시를 탔더니 하도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가서, 그게 더 불안했던지라 그 돈은 너무 아까워하지 않기로 했다. 도착한 숙소는 구시가지 가운데도 그냥 시내 중심가도 아닌, 거의 산동네 꼭대기에 있는 작은 호스텔이었다. 보다시피, 이렇게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짧게 관광하기에 좋은 위치는 아니지만, 그 대신 1인당 10유로씩 내고 침대 네 개짜리 넓고 환한 방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 전혀 불만은 없다. 일단 침대에 널부러져서 기차여행의 피로부터 좀 푼 다음, 뭘 제대로 먹으려 해도 보스니아 돈이 없다는 치명적인 사태(!)를 맞이하여 유로 받아주는 택시를 타고 다시 시내로 기어나갔다. 




일단 마음에 드는 까페에 앉아서 간식과 맥주 한 잔.






그리고 슬금슬금 비가 오다 말다 하는 시내를 돌아다녔다. 



터키쯤 가면... 아니, 당장 며칠 후에 스페인 남부만 가도 이 풍경이 참 초라해 보일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이슬람 유적들이 즐비했지만, 모스크를 제대로 보는 건 여기가 처음이었던지라 신선함이 컸다. 



사실은 새벽에 사라예보에 도착할 때, 창밖으로 전쟁의 잔해가 고스란히 보였더랬다. 총탄자국이나 허물어진 건물을 아직도 다 해결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관광 중심지인 구시가지에서는 그런 스산한 느낌을 거의 받을 수 없고, 구시가지에서 조금만 걸어나가면 나오는 신시가지 중심부는 또 의외로 휘황하다. 자그레브보다 더 번화한 느낌마저 있을 정도였으니. 




이쯤에서는 적응도 좀 됐겠다, 야경까지 실컷 보고 나서 색색깔의 과일을 사들고 마을 버스를 타고 들어갔다 :)




7월 5일. 느긋하게 일어나서 짐싸들고 내려와 구시가지에서 느긋하게 밥을 먹고 모스타르행 버스에 탑승. 



고기 요리야 무난하지만, 아래 접시에서는 슬슬 터키-중동지역 음식의 영향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