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유럽
베를린 장벽과 두부버거, 2012년 6월 20일-21일
askalai
2012. 11. 23. 12:26
2012년 6월 20일. 계속 비.
비는 그쳤나 싶다가도 다시 내리고, 잦아드나 싶다가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8시, 9시까지 해가 지지 않는 계절이건만 하루 종일 해질녘같은 분위기에 더 쉽게 지친다. 베를린에서 하루 이틀 그 날씨를 경험하고 나니, 왜 유럽에서도 영국인과 독일인들이 제일 경쟁적으로 햇빛 쏟아지는 곳을 찾아 떠나는지 이해가 갔다.
어쨌든 베를린에 갔으니 베를린 장벽(Berlin Wall)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날 볼까 싶기도 했지만, 충동적인 결정에서 박물관 섬을 떠나 전철을 타고 그쪽으로 향했다.
물론 장벽에 예전 그대로 남아있다면 멀리 갈 필요도 없었으리라. 베를린 전역에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벽이 무너졌다는 말은 말 그대로 벽이 없어졌다는 뜻. 1989년에 있었던, 행정 오류와 실수가 시위와 결합하여 이루어진 붕괴 이후 몇 년에 걸쳐 베를린 전역에 걸친 벽이 다 철거되고, 이제는 포츠담 광장 근처- 과거 동베를린 지역에 일부만 기념으로 남아 있다.
S-반 오스트 역에서 내릴 무렵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비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가서 찾은 그 벽은, 1.3킬로미터짜리 벽을 화폭으로 삼아그림을 그린 수많은 예술가들 덕분에 야외 미술관이 되어 있었다. 앞면에는 예술가들이 작품을 남기고, 뒷면에는 이름 없는 이들이 낙서를 했다지만 앞이나 뒤나 예술이다. 그래서 현재 이곳의 정식 명칭은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작품 설명 그런 거 없다. 그냥 작품 제목과 날짜, 화가 이름 정도만 붙어 있음.
슬슬 나온다
벽 뒷면. 벽부터 강가까지는 빈 공터였다.
앞면에는 이런 작품들이 있다.
찬찬히 그림을 보면서 걷다보니 곧 끝이 나온다
여기에서 무슨 대단한 감동을 느낀다거나 지구상에 하나 남은 분단국가의 상황을 생각한다거나 하는 건 작위적인 기분이 들지만, 그냥, 그런 거 빼고도 아름다운 그림이 많다. 에 그... 유명한, 가끔 짤방으로 돌아다니는 작품 '형제의 키스'도 여기에 있지만 그 사진은 굳이 올리지 않겠다. 궁금한 분은 검색해보세요 핫핫;
이 날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니까 다음날인 21일에 가본 곳까지 연결하여 쓴다. 과거 동서 베를린을 오가던 유일한 통로이자 검문소, 서방에서 '체크 포인트 찰리'라고 부르던 곳도 현재 그 자리에 남아있다. 기념품점 겸 박물관으로 사진 자료를 전시하고 무너진 벽에서 나온 돌조각; 등을 팔기도 한다. 기념품을 잘 사는 편이 아니지만, 나도 혹해서 여권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
그리고 21일에 돌아본 베를린 시내 중심가에서는 누군가가 설치 예술품처럼 예전 장벽 자리에 파이프를 설치해 두었다. 분홍색으로. 어쩌면 이거야말로 벽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실물의 장벽이 있었을 때라 한들 그 벽에 실체가 있었을까.
다시 20일로 돌아와서, 저녁에는 꼭 가보고 싶었던 다리밑 버거집을 찾았다.
론리플래닛에는 '버거마이스터Burgermeister'라고 적혀 있지만 간판 따위 없다. 크로이츠베르그 지역 U-반 전철역 밑에 있는 백년된 공공 화장실을 개조하여 지은 특이한 버거집. 그러나 싸고 크고 맛있다. 베를린에서 가격 대비 최고라는 말도 있음.
이 위로 U-반이 지나갑니다
이런 건물. 물론 내부 자리 따윈 없음
고기 넣는 보통 버거도 맛있어 보였지만 모험심 발동으로 채식 두부버거에 도전! 맛있었다 츄릅
...그러니까 맛있고 다 좋긴 했지만, 비오고 으슬으슬 추운 날씨에 다리 밑에 앉아서 우걱우걱 버거를 먹는 신세는 좀 처량해 보였겠지...
경찰이 잔뜩 와서 버거를 사먹고 있었던 게 위안이 되었다. (응?)
아무튼 엄청난 피로와 오한을 안고 웜뱃 호스텔 귀환. 씻고 일찍 자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