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서 메본West mebon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아 순서를 무시하기로 했다. 서 메본을 찾은 건 7월 26일. 시끄럽기도 하고 나름 좋기도 했던 한국인 한 무리가 새벽같이 떠난 다음이었다. 물론 떠나기 전에 함께 술을 퍼마시고 2시인가 3시쯤 잤지만, 배웅이라도 할 생각으로 잠들었더니 일찍 깨고 말았다. 무려 6시 반에 일어났는데도 베트남으로 떠나는 팀은 이미 가고 없어서 허탈했지...
아무튼 그래서, 잠도 안오고. 다시 사원을 보러 나섰다. 반테 삼레에 갔다가, 타 프롬에 다시 갔다가, 앙코르 톰 남문으로 나와서 박세이 참크롱에 들렀다가, 서 메본으로 향했다.
서 바라이. 비탈진 돌댐은 천년이 다 되도록 튼튼하기만 하다.
서 바라이, 물가. 주말도 아니고 아직 우기라서 놀러나온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 메본은 동 메본과 한쌍이다. 도시 동서에 하나씩 자리잡았던 큰 바라이(저수지라고 해야 하나?)의 중심지인 셈. 동 메본은 10세기 말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지었다는데 지금은 저수지는 다 마르고 신전만 정글에 우두커니 서 있다. 서 메본은 11세기 후반 우다야디트야바르만 7세의 건축으로, 신전은 다 무너졌고 바라이는 3분의 2에 물이 차 씨엠리업 사람들의 주말 휴양지로 쓰이고 있다. 어쨌든 동 메본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에, 서 메본도 내 취향일 거라고 생각했다.
젠(바이크 기사)은 늘 그랬듯 이번에도 내 결정에 토를 달았다. 서 메본은 다 허물어진 폐허라며 볼 게 하나도 없단다. 5일을 같이 다니며 매번 내가 폐허를 좋아한다 하지 않았던가? 이상한 부분에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친구였다. -_-
뭐, 사실 젠이 그렇게 말리지 않았다면 나도 보트 값에 질려서 (자그만치 8달러나 불렀다! 깎아서 5달러에 타긴 했지만) 호수만 보고 물러났을지도 모르니, 고집을 부려 서 메본까지 가게 해준 데 대해서는 감사하기로 하자.
배를 타고 5분? 10분? 바람이 좋더라. 한가운데 동그마니 솟은 섬으로 가서 배를 댔다. 정확히는 삐그덕거리는 나무 기둥에 메어놓고 발을 적시며 섬으로 건너간 거지만...
서 메본이 있는 곳은 섬 한가운데. 조금 높게 도드라진 언덕 위다. 그리고 그 주위 사방은 그저 평평한 논 뿐이었다.
15분쯤 걸어서 겨우 도착한 서 메본은 정말로 폐허였다. 겨우 벽 한쪽, 주춧돌 몇 개만 남아 있을 뿐, 벽 가운데엔 마을 사람들이 낮잠을 즐기고 노는 정자 같은 것만 서 있고 앙코르 유적지마다 꼭 있던 음료수 파는 장사꾼 하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여기가 무척, 무척 마음에 들었다 ^^
기울어진 문 밖으로 물가까지 쭉 이어진 들판
폐허 바로 앞에서 일에 열중해 있던...
주위에 펼쳐진 논
내세울 만한 조각 하나, 역사적인 배경 하나 없는 곳이지만 무너진 돌 위에 앉아 볕을 쬐며 보던 하늘과 들판은 앙코르에서 본 어떤 풍경에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고집을 부리고 갈 만한 가치가 있었다.
나중에 숙소로 돌아와서 남아있던 한국인에게 이곳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사람이 전혀 농담같지 않은 얼굴로 "그 정자에서 정기적으로 전통공연같은 거라도 하면 잘 팔리겠네. 그런 걸 강구해야지."라고 말해서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글쎄, 별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어보이지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지도. 내 것은 아니라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