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히메유리와 평화공원
낙원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곳이지만 오키나와섬을 비롯한 류큐 제도의 근대사는 파란만장 그 자체다. 아직 진행중이니 역사라고만 하기도 그렇다.
"날씨 좋구나~"하고 하늘을 보면 미군 헬기가 날아가고,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도 GJ가 헬기가 떨어져서 다시 지은 건물,
전쟁 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서 땅을 팔 수 없다는 곳, 유령이 나온다는 호텔을 짚어준다.
2월 12일, 오키나와섬 남쪽에 있는 히메유리 기념관.
기념비 아래쪽에 입을 벌린 구멍은 당시 오키나와 사람들이 참호로 삼았던 자연굴 같은 것이라고...
이런 식...단면도를 보니 의외로 속이 깊고 복잡하다
히메유리란 백합꽃의 일종인데,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 학생들이 전투에 간호병으로 참가했을 때 '히메유리 부대'로 불렸다고 한다. 219명의 학생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 영토 중 유일하게 육상전이 벌어진 이 섬의 치열한 전투에서 이긴 것은 미군이었고, 학생들은 항복하면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기념관에는 당시에 죽은 학생과 교사들 모두의 사진을 찾아서 붙여놓고, 당시의 일기를 전시해두고 있다. 이 때 죽은 학생은 모두 오키나와 출신이었다.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평화기원 종이학이 눈부시다
오키나와 섬을 비롯한 근방 섬을 영토로 하던 류큐 왕국이 망하고 일본에 합병된 것이 19세기 말. 그리고 50년만에 2차 대전이 터지고 오키나와는 일본 영토 중 유일한 지상 전투의 무대가 된다. 오키나와는 일본의 항복 선언이 떨어지기 2개월 전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미국 기지화. 다시 1970년대에 일본에 반환. 일본의 영토가 된 뒤로 그들이 일본에게 얻은 것이 뭘까? 전쟁의 총알받이, 패전의 희생양, 또다른 식민지화. 오키나와 사람에게, 적어도 GJ같은 이들에게 히메유리 기념관은 그 역사의 기록이다. 학생들이 자살을 택한 것은 미화시킬 수 있는 기억이 아니다.
GJ는 '세뇌'라고 표현했더랬다.
그러나 오키나와 여행을 오면 반드시 히메유리 기념관을 찾는다는 일본 본토 사람들에게도 그런 의미일까? 혹 그들에게는 이것도 "일본의" 비극이고 "일본의" 장렬한 옥쇄로 보이는 건 아닐까? 우리가 기념관을 둘러보는 동안 열심히 설명을 받아적고 있던, 수학여행을 온 건지 견학을 온 건지 알 수 없는 중고생들은 한쪽 벽에 커다랗게 적힌 '18XX년 류큐왕국 멸망' '1945년 6월 XX일 함락' 이라는 말들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까? 어렵기 때문에 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
어쨌거나 둘러보고 멀지 않은 평화기념공원으로 이동.
여기도 히로시마 원폭기념공원 못지 않게 평화롭다
이곳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은 '모든' 사람의 기록이 남아 있다. 미군, 일본군, 오키나와 사람은 물론이고 한국인까지. 늘어선 비석에는 오로지 어디 국적의 누구라는 기록밖에 새겨져 있지 않다. 여기는 야스쿠니 신사가 아니다.
한국인 이름이 새겨진 곳. 한쪽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이름들이, 한쪽에는 대한민국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찾아달라는 사람이 나와야만 찾아서 새기기 때문에 아직도 진행 중인 작업. 2006년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추가되어 있었다.
모든 기억은 왜곡되고, 미화된다. GJ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오키나와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 없다. 전쟁의 기억도 정치와 이념과 편리에 따라 다르게 전해질 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오키나와 사람들이 이곳에 전하고자 한 마음은 그게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한국 와서 조사에 따라나갔다가 할아버지 할머니들께 일본인으로 낙인찍히고 가해자로 매도당하는 오키나와 사람의 복잡하고 억울한 마음이 한층 이해가 가더라. 어르신들도 좀 알아주셨으면 좋을텐데 말이지 ^^;;;
평화공원 옆에 펼쳐진 바다
마무리로. GJ가 히메유리 앞 기념품가게에서 꼭 '설탕튀김'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왠 설탕튀김?? 이라고 생각했으나... 진짜 맛있었다.
집에서 만든 도넛 같은 느낌. 다 먹고 나서야 이게 '사타안다기'라는 걸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