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본섬 동쪽-간토, 주부

[일본여행] 넷째날, 하코네 - 비바람 속의 악전고투

askalai 2002. 11. 12. 15:09
7월 15일. 이 날은 올릴 사진이 없다.

새벽 5시 반에 깨어 뉴스를 확인해 보니 태풍 할룽은 현재 오키나와에 있으며, 저녁 때쯤에나 본토에 상륙, 다음날인 16일 오전에 도쿄를 통과한다 했다. (물론 내가 들었을 리는 없고 E양과 G양이 그렇게 말했다) 바깥 날씨를 보니 오히려 태풍 전 고요 덕분인지 날씨가 화창하기만 했다. 다들 기뻐하며 햇살에 어울리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숙소를 나섰다.

8시경 신주쿠 도착, 하코네까지 왕복 교통과 하코네의 케이블카, 등산열차, 유람선 등을 책임져줄 프리패스를 사서 오다큐센을 탔다. 들어가자마자 오다와라 행 차가 왔지만, 전날의 실수도 있고 해서 한 번 더 살펴보니 이것도 앞쪽과 뒤쪽이 갈라져서 다른 데로 가는 차였다. 우리가 앞이라고 생각한 쪽이 뒤라는 것을 깨닫고 허둥거리다 보니 그 차는 놓쳐버리고 말았지만, 다음 차가 하코네유모토까지 가는 열차여서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미리 확인해본 바로는 9시 반이 지나면 오다와라에서 고라로 가는 등산열차 운행이 없다고 했으니까, 어차피 종점인 하코네유모토까지 가야 했다.

하코네 箱根. 한 해 200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관광객이 다녀간다는 관광지. 험준한 화산지대를 개발하여 천혜의 관광상품으로 포장해낸 이 유명한 관광지는 등산열차와 케이블카, 로프웨이, 유람선이라는 다양한 탈것으로 다양한 자연경관을 보여주는 데다가, 맛있는 먹거리가 많은 곳이다. 화산지대 오와꾸다니의 부글부글 끓는 온천수로 삶은 검은 계란이라든가, 온천수를 써서 만든 다양한 두부, 만주, 모찌단고...우리의 여행계획은 그런 것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열차가 하코네를 향해 가면 갈수록 화창한 하늘은 구름에 덮이고 덩달아 우리 계획도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
 
완벽한 판단 미스였다. 하코네가 도쿄보다 남쪽에 있기 때문에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있는 데다가, 기본적으로 고산지대기 때문에 바람이 훨씬 심하게 분다는 것, 날씨가 훨씬 변덕스럽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도쿄에서는 이래도 덥다고 생각했던 가벼운 옷차림이, 하코네유모토역에 내리고 보니 후회스럽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우린 우산도 변변히 챙겨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왔으니 가는 데까지 가봐야지. 일단 등산열차를 타고 고라까지 갔다. 워낙 험준한 산을 기어올라가기 때문에 등산열차는 '스위치 백' 형식으로 앞뒤로 방향을 바꾸곤 한다. 창 밖으로는 바람이 휭휭 불어 무성한 나무가 이리저리 흔들리고...나름대로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고라역 도착. 이 부근에는 고라 코엔(고라 공원)이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로프웨이가 움직일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강한 우리로선 고라공원에 주의를 기울일 경황이 없었다. 다행히도 일단 로프웨이의 기착점인 소운잔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는 운행하고 있었다. 한숨 놓고 도시락 대신으로 핫도그를 하나씩 산 다음, 역에서 파는 모찌 단고를 먹어보았다. 예전에 먹어본 단고와 같은 음식에 들어가는 게 맞나 싶을 만큼 맛있었다. 말랑말랑한 떡에 팥고물이 잔뜩 들어가 있고 겉은 노릇노릇하게 구워서...스읍(침닦고).

어쨌거나 기다려서 빨간색 케이블카는 경사길을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각도가 급해서 이것도 나름대로 스릴이 있었고, 경치도 좋았다. 하지만 130미터 높이의 대협곡 사이를, 외줄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15분 동안 가게 된다는 로프웨이에 비할까. 그러나...매섭게 불어대는 바람을 보며 반쯤은 예감했던 일이지만, 날씨 때문에 로프웨이는 운행을 중단한 상태였다.

로프웨이를 타고 가면 어디로 가느냐고? 유황수에 달걀을 삶아주는 오와꾸다니로 간다. 달걀 한 개를 먹을 때마다 수명이 7년씩 는다는 말에 혹한 것은 아니지만(...) 김이 푹푹 쏟아져나오는 지옥의 화산지대를 보고 싶었는데.

역무원이 오와꾸다니까지 임시 버스가 다닌다고 알려주기는 했지만, 설상가상으로 비도 뿌리기 시작했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허탕 칠 위험을 감수하고 오와꾸다니로 가볼까. 아니면? (버스가 하코네 프리패스로 탈 수 있는 차였으면 망설임이 덜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니었다.)

한참을 망설이며 우리끼리 의논을 하고 있으려니, 안되어 보였는지 역무원이 다시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로프웨이와 유람선을 결항할 경우 환불해 준다는 것. 오오~ 합리적이군. 프리패스 한쪽 모서리를 잘라내고 1190엔을 환불받으니 왠지 공돈이 생긴 것처럼 기뻤다. 아무튼 유람선도 결항이라면 오와꾸다니까지 가봐야 별 뾰족한 수도 없다. 아예 방향을 틀어서 곧장 호수가 선착장으로 가보기로 했다. 물론 이번에는 프리패스가 통하는 버스를 타고.

다시 고라역까지 내려가서, 등산열차를 타고 고와키다니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리면서 피폐하게 핫도그를 먹어치우고 (알고보니 듬뿍 묻혀진 소스가 겨자가 아니라 와사비였다! 정말 견디기 힘든 맛이었다--;;) 버스를 타고 하코네 마찌로.

버스에 앉아 대관령 못지않은 하코네의 산중을 뚫고 달리는 것은 백귀야행에 뛰어든 것처럼 기묘한 시간이었다. 비가 오는가 마는가 싶더니 서서히 안개가 깔리기 시작, 목적지에 다가갔을 즈음에는 자욱한 안개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 몽롱한 느낌. 멍하니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다 보니 언덕을 넘어 내려가면서 조금씩 안개가 옅어졌고, 목적지인 하코네마찌 - 산정호수인 아시노코의 유람선 선착장이 있는 작은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안개의 근원은 아무래도 이 호수인 모양이었다. 안개가 깔린 아래로 검푸른 물이 바람에 철썩이는 모양을 보니 유람선이 움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게 바보스러웠다. 당연히 유람선은 두 척 모두 선착장에 매여 있었고, 우리는 그래도 이대로 갈 순 없다는 고집에 그 바람부는 선착장에 서서 유람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놀랍게도 나중에 현상해 보니 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는 표시는 별로 나지 않는다. 셋 다 어지간히 피폐하긴 하지만;;

원래 하코네마찌로 향했을 때는 여기에서 모또하코네로 향하면서 유서깊다는 삼나무 숲길을 걷자...는 계획이었건만, 너무 추워서 그것마저 포기. 오들오들 떨며 세븐 일레븐에 들어가 오뎅을 사먹은 다음 하코네유모토로 가는 버스를 타고 말았다.

온천지인 하코네유모토.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아까의 비바람과 안개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날씨가 평온하다. 날이 흐리기는 했지만 그리 춥지도 않았고. 뭔가 속은 듯한 느낌이지만 사실이니 어찌하리. 온 목적을 수행할 밖에. E양과 G양에게는 이미 찍어둔 온천이 있었다. 물론 준비도 갖춰왔고. 나? 나는 여기에서 잠시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 돌아다녔다. 왜인지는 묻지 마시길.

친구들과 다시 만나기로 한 시간은 5시. 혼자 뭘 할까 고민하며 하코네 프리패스를 살 때 집어온 여행안내를 들여다보았다. 멀리 가지 않고, 그리 헤메지 않으면서 돌아볼 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박물관과 미술관이 몇 개 있기는 했지만 과연 입장료만한 가치가 있을지가 문제였다. 여행안내를 보다 보니 부근에 절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소운지.

자, 안내책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 이 절은 1521년에 이 지역의 영주였던 호죠 우지츠나에 의하여 지어진 그 일가의 절이며 그가 서거한 후 그의 아들인 호죠 소우운의 이름이 지어졌다. 여기에는 수많은 문화유산이 많으며 그 하나인 용과 범이란 그림은 중요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여 있다. ]

......누가 번역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어를 그리 잘 한다고는 못하겠군. 어쨌거나 난 저 마지막 문구에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지도를 보고 혼자 소운지로 향했다.

동네 뒷산이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이것도 등산길이었다. 10분, 15분쯤 걸렸을까?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평지로 들어섰는가 싶더니 너무나 이국적인 -- 혹은 일본적인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낯선 느낌이었다. 동경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이질감이 엄습해 왔다. 동시에 이질적이기 때문에 따라오는 친근감도.

평일 낮이라서일까, 원래 그런 마을일까. 집집마다 너무나 조용했다. 안개 속에서 산길을 뚫고 달릴 때에 이어 두번째로 뭔가 엉뚱한 곳에 빠진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물어볼 사람도 없어 잠자코 이어지는 길을 따라갔지만, 의외로 소운지는 금새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진짜 관광안내에 써있던 그 소운지가 맞는 걸까. 쇠락하기 짝이 없다. 버려진 절처럼 스산하고, 사람도 없다. 절 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둘러보니 분명 관광지로 입장권을 팔던 곳도 남아있기는 한데...더 이상은 운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용과 범 그림도 볼 수 없다는 거로군. 조금 섭섭한 감도 있었고, 동시에 이 쇠락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기도 했다. 사진기를 친구들 쪽에게 맡겨둔 게 아쉬웠다.

잠시 고요를 즐기며 경내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단체 관광객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이런, 그러니까 관광지가 맞긴 맞는 거였군. 중년, 노년의 일본 사람들로 이루어진 관광객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안을 둘러보았고 그 서슬에 나는 막 들어가려던 경내 묘지를 피해서 반대 방향으로 도망쳐야 했다. 짤랑 소리가 나며 버려진 듯만 보이는 함에 동전이 들어가고, 짝짝 손바닥을 부딪치고 머리를 숙인다. 소원빌기는 버려졌건, 운영을 제대로 하건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범종을 보고 그 앞 돌에 앉아서 일기를 적고 있는데 예쁜 냥이와 마주쳤다. 범종 뒤편 잔디밭에 가만히 앉아있는 폼이 너무 조용해서 순간 인형인가 싶었지만, 내가 한 발짝 다가가자 화다닥 놀라서 저쪽으로 튀어가는 걸 보니 확실히 산 냥이다. 녀석은 내가 가만히 있자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가가자 다시 뒤로 물러선다. 털빛이 야쿠르트색이었다. 아아, 이 순간 정말 카메라가 아쉬웠다.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다음 다시 경내 묘지로.

기묘한...기괴한 느낌이었다. 빽빽이 꽂혀있는 묘석들 사이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서서 눈을 감았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다가 나에게 부딪쳐 갈라지며 주위를 휘감고 지나간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 순간적이었지만 파워 스팟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면 믿으려나? ^^

묘지 위쪽에는 오다와라 성주 다섯 명의 묘가 있다. 1432년부터 1591년까지 159년 동안 다섯 명이라. 묘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소박하지만, 낡은 비석 앞에 흰색과 검은색 술잔이 한쌍씩 놓여있는 게 신기했다. 이건 무슨 의미였을까.

시계를 보고 절 밖으로 나서서 작은 공원에 앉았다가 아까의 고양이와 다시 마주쳤다. 이상한 녀석이었다. 내 앞에서 데굴데굴거리면서 의자에 몸을 비비다가도 내가 손을 내밀거나 움직이기라도 하면 흠칫 하고 달아나는 모습.

터덜터덜, 올라간 길과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다가 또 한 번 사진기가 아쉬운 건물에 맞닿뜨렸다. 찻집이었는데, 문이며 벽에 빽빽하게 탈이 걸려 있었다. 각양각색의, 모두 웃는 얼굴을 한 탈들.

죽 내려가다 보니 다시 숲으로 들어가는 계단. 이쪽에는 소운지보다 훨씬 쇠락한 신사가 하나 있었다. 들여다보니 천조대신 신명 神明 신사라고 씌여있다. 소운지도 그렇고 왜 다 문을 닫았을까...마을 문화재의 운명이라는 건가.

개천을 건너 다시 하코네유모토 역 앞으로 돌아와 보니 4시 45분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간 셈이다. 무료한 김에 역 앞에 죽 늘어서 있는 상점가를 기웃거리다가 결국 빈손으로 나오고 말았다. 돌아다녀서 그런지 배가 고팠고, 공기에 습기가 가득차 무거워져 있었다. 친구들이 오면 같이 먹을 생각으로 카스테라 만주 15개들이를 사서 역 앞 벤치에 앉았다. 녀석들은 온천이 얼마나 좋았는지 자랑 자랑을 해댔다. --+

만주를 먹은 덕에 배고픔이 가셨고, 차시간을 확인해 보니 5시 50분에 신주쿠행 차가 있다. 그 김에 도쿄로 돌아가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차에 올랐다. 이번에야말로 전전날에 찾지 못한 초밥집을 찾으려고 작심......했으나 이 날도 헤매고 말았다. 결국 또 포기하고 맛없는 회전초밥 몇 개로 밥을 때운 다음, 그 대신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제과점 앞에서 파는 50엔짜리 고로케를 몇 개 사고, 벼르던 맥주를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아사히, 기린, 삿뽀로 맥주......맛있었다.
맥주 자판기도 안보이고, 주위 편의점 중에 술 파는 데가 없어서 몇 번이나 헛탕을 쳤는지. (그러나,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역 앞에 술 파는 편의점이 있었다. 다들 아무도 옆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은 탓이지 뭐 ;;)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을 지나는 태풍은 속도가 줄지 않는다. 7호 태풍 할룽은 무서운 속도로 전진, 다음 날 오전 중에 도쿄를 치고 지나갈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오후에는 괜찮아진다는 것이다......다음 날의 목표는 요코하마였다.